◑ 일면불 월면불 ◐ ◑ 일붕 서경보 큰스님 ◐ 일면불 월면불 (日面佛 月面佛) 일면불 월면불이여 오제삼황이 이 무슨 물건인가 이십년 이래에 일찍이 신고를 하였으니 그대를 위하여 볓번이나 창룡굴에 내려갔었는가 엎드렸다가 견디어 진술하노니 눈 밝은 납승은 경홀하게 여기지 말지로다. 이상에 든귀는 <벽암록>제3칙에 있는것인데, 마대사불안(馬大師不安)이란 공안에 나온 것이다. 이 공안을 설두대사 라는 스님이 송(頌)을 붙여서 시형(詩形)으로 찬탄한 것이다. 마조대사란 이는 마조도일 선사를 가리킨 것이니 옛날 중국강서땅에 마조산이 있었는데 그곳에도일선사란 스님이 계셨다. 그래서 그 도일선사를 마조대사라고 부륵 된것이다. 이 마조대사는 육조 헤능대사의 손제자 이므로 달마대사에게는 대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모양이 기이하여 소와 같이 걸으며 호랑이 같이 보고, 혀를 내면 코를 코를덮는다고 하였으니 몸이 크고 형모가 무서운 호걸같은 스님이 라고 하겠다. 또 그 스님의 밑에서 80여인의 선지식이 배출했다고 하니 도가 높은신 스님인 것을 가히 짐작 할수있다. 이 마조 대사께서는 만년에 당나라 덕종 정원4년 정월에 석문산이란 산에 올라가서 시자에게 수풀 가운데 있는 바위굴을 가리키며 '나의 무너진몸이 내월에 이르러서 이 땅에 돌어올 것' 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과연 2월1일 에 80세의 고령으로 입적했다. 그런데 이 마조대사의 불안이란 문제는 정원4년 1월말에 일어난 것으로 단정된다. 이와같이 생사에 자재를 얻고 자기의 돌아날 날을 예언한 도덕을 가진 스님이지만 육신을 가진 분이라 임종때에 이르러서 는 병환이 나셨던 것이다. 그래서 원주의 직책을 맡은 스님이 딱하게 여기고 "스님께서 병환이 중하신 모양인데 근일에 기분이 어떻하십니까?' 하고 병문안을 하였더니 그때 마조대사께서는 그 전보다 더 하다든가 덜하다든가의 이런 말씀은 하지아니하고 '일면불 월면불' 하고 대답했다 명쾌한 대답이었다 . "일면불 월면불' 이란 말은 그 무렵에 보리유지삼장 이라는 역경가가 인도에서 중구으로 나와서 번역한 <삼천불명경>이 있는데, 그 경 가운데 불명이 었다. 그런데 마조대사는 동문서답과 같이 원주가 병환이 어떠냐고 물음에 '일면불 월면불' 이라고 대답을 하였으니 이것이 천고의 의문인 하두공안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뒤 설두대사가 송하되, 일면불 월면불이여 오제삼황이 이 무슨 물건인가 이십년 이래에 일찍이 신고를 하였으니 그대를 위하여 볓번이나 창룡굴에 내려갔던가 글했다가 견디어 진술하오니 눈 밝은 납승은 가볍게 여기지 말지로다. 그런데 <불명경>주에 볼것 같으면 일면불은 수명이 1천3백세요 월면불은 수명이 하루낮 하룻밤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제삼황은 중국개벽의 황제로서 수명이 1만8천세라고 전한다. 그러나 마조대사의 심경은 이미 생사에 안목에 있지않고 장수 단수가 눈가운데 있을 이치가 없는지라 1천8백세거나 1일1야거나 1만8천세거나 모두가 탄지순목(彈指瞬目)간 이기 때문에 오제삼황이 다 무슨 물건이냐고 한말이다. 그러니까 '일면불 월면불'이라고 한것은 이미 생사를 뛰어날 뿐만아니라 범성의 세계까지 뛰어난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에게 발을 씻기고 석가에게 안마를 시키는 일도 차마시는 일보다 쉬운 것이니 5제니 3황이니 하는것이 다 무엇이냐고 한 것이다. 그런즉 이 송을 지은 설두대사에게 왕자의 기백이 있을뿐만 아니라 왕자를 집어삼킬 만한 기백이 있음을 내뱉은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한 글귀가 문제가 되어서 <벽암록>이 재앙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후세 송나라 신종때의 일이었으니 중국서 <대장경>의 <소장경>이 편집될때 '5제 3황이 무슨 물건이냐? 는 한 글귀가 국체의 존엄을 모독함이라 하여 유장스님께 <벽암록>이 <속장경>에 편입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즉 설두스님이 필화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그말은 불법의 이치로 본다면 5제3황 ,을 헐뜯는 것이 아니라 칭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석가세존이 싯다르타 태자로서 처음 탄생할 때에 두루 칠보를 걷고 눈으로 사방을 보고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손으로 땅을 가르키고 외치되, "천상천하에 내가 홀로 높도다 "한 일에 대하여, 후세에 운문대사는 이르되. ' 내가 그 당시에 보았더라면 한 망방이로 때려 죽여서 개를 주어천하에 태평을 도모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하여 분하다 '고 한일이 있다. 그러나 우리 선가에서는 운문이 부처님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찬탄한 것으로 보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속자로서는 이런 뜻을 모르기때문에 설두대사를 그르다고 한것이다. 일본에서는 조동종의 천계선사라는 이가 있었고 .임제종은 백은선사가 있었는데 이 두스님은 덕천시대에 종문재흥의 걸승 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때에 백은대사는 준주의 송음사 주지로 있었고, 천계선사는 같은 준수땅에 정거사 주지로 있었는데 어느때에 천계선사가 부사천을 건너게 되어 어떤 다점에서 쉬다가 그곳에서 가마를 메고 다니는 교군꾼인 천인에게 '이 근방에 백은이라는 천치 바보중이 있을 터인데 잘있다더냐?' 하고 물었다. 그 주변에서는 백은화상이라면 생불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터이라 교군꾼은 화가 나서 쏜살같이 송음사로 달려가서, "스님 지금 저 다점에 이러이러한 인상을 가진 떠돌이 중이 와서 스님을 가리켜 말하되, 이 근처에 백은이란 바보천치 중이 요사이도 잘있느냐고 하니 이러한 말버릇이 어디있습니까? 화가치밀어 두들겨 줄까 하다가 풍채가 너무 근사하게 생겨서 일단은 스님께 여쭈어 보고 거사를 하려고 뛰어 왔습니다 ' 한다. 그러나 이말을 들은 백은스님이 빙긋이 웃고, ' 그스님은 정거사에 계시는 천계스님이시다. 나에게 욕을 한 것이 아니라 그 훌륭한 대선지식스님이 잘 계시냐고 깍듯이 인사말을 전한 것이니라' 하고 오히려 좋은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교군꾼이 의아하여 다시묻되,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하였더니 백은화상이 말씀하시되, " 너희같은 사람에게 그 스님이 이르되, 내가 대선지식이 백은스님께 들려가고 싶으나 총총하여 들리지 못하고 니 문안 말씀이나 잘 전해주게 했다면 너희가 잊어버리고 말지 나에게 까지 이렇게 뛰어와서 전갈을 하여 주겠느냐 그러니 일부러 너희에게 신경질이 나게 말을 해서 너희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냐?' 했다. 그래서 그 교궁꾼도 입을 딱 벌리고 웃으면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원래 선문에서는 서로 욕설을 하는것이 칭찬이기도 한 것이다. 백은이나 천계나 다 <벽암록>연구의 대가로서 백은은 '일면불 월면불' 구절에 대하여 삼세제불과 범천제석이라도 관을 벗을 정도로 사실상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였고, 천계화상은 5제3황에 대하여 김서방, 이서방, 장도령, 박도령, 동여인, 서여인, 강아진가, 고양인가, 이 무슨 물건인고 하고 평했다. "20년래 일찍이 신고하였으니 그대를 위하여 볓번이나 창룡굴에 내려갔는가?' 라고한 시귀는 설두대사가 자신의 수행시대를 추억하고 술회한 것이다. 또는 현재 수행하려는 젊은이를 위해 경계한 것이다. 설두대사가 일면불 월면불의 미묘한 법문을 손에 넣어서 대자제, 대안락을 얻어 감사한 생활을 하게 되어 제황이 이 무슨 물건이냐는 견식까지 갖게되었는데 여기까지 이르기가 보통일이 아니다. 가죽이 닳고 힘줄이 끊기고 뼈가 부서질 지경의 피눈물을 흘리며 공부를 하느냐고 신고한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요, 감개무량이라 도저히 지필로 그릴수 없는 눈물을 삼킨 술회담이었다. 어떠한 수행에도 그렇지만 더욱이 좌선의 수행이란 것은 보통의 고생이 아닌 것이다. 검은장삼에 도첩주머니를 목에 걸고 짚신을 신고 동서를 행각하며 나무 밑과 반석위에서 풍상노숙을 하며 이곳 저곳의 선지식을 찾아 다닐 때 바로 입당하여 주는 것도 아니요, 뜰밑에서 3일씩 7일씩 엎드려 불면불휴의 시험을 마치고 겨우 참당을 허락하게 된다. 그로부터 다리를 펴고 자지도 못하고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눈이 날리는 겨울이나 더위가 찌는 여름날에 모기에 물려가며, 기갈과 망상과 수마와 싸워가며, 가슴을 태우고 공부 하는 일이 여간 고생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20년을 지나고 보니 이것이 얼마나 지독한 고생인가?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고통은 오히려 누워서 떡먹기다. 그 위에 정신적고통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형언할 수가 없는 것이다. 풀을 헤치고 바람을 쐬며 깊은 도를 탐구하면서 헤메고 다니는 것은 오직 견성을 도모하는 것이니 이 깨달음을 얻어서 자기의 본성을 밝히지 못하면 참선납자로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데체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란 본체가 어떠한 것인가, 진실한 자기와 영원한 자기와 절대적인 자기가 무엇인가, 이러한 자기가 있다면 어떤 곳에 있는가? 석가세존께서 견성대오하시고 '기이하고 기이하다.일체중생이 다 여래의 지혜덕상을 갖추고 있건마는 미(迷)하여서 돌이키지 못하는구나 '하셨으니 나의 몸 어ㅡ느곳에 여래의 지혜덕상이 있는가? <화엄경>에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이 3가지가 차별이 없나니라 ' 하였으나 이 욕심꾸러기인 3독 번뇌가 뭉쳐지 나에게 어떤 것이 부처와 차별이 없다는 것인가. 이것을 규명하고 참수하는 고생은 불 가운데 물을 구하고, 석탄가운데서 황금을 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공부를 하자면 10년20년 걸쳐서 눈물겨운 체험으로 은산과 쳘벽을 뚫는 힘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용의 턱밑에는 훌륭한 여의주인 마니주가 달려있다고 하거니와 그 구슬을 얻어서 손안에 넣는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 새끼를 얻을수 없는 것과 같아서 청룡이 도사리고 있는 동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여의주를 구경도 할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한번이나 두번만 들어가서 얻는 것이 아니다. 몇십번 들어가서 청룡과 싸워서 구슬을 얻어와야 되는 것이니 .목숨을 아껴 가지고는 안되는 것이다. 한이 있는 몸으로써 무한의 생명을 구하고 상대적인 사람으로서 절대적인 심성을 바꾸기 때문에 그 신고하는 것을 헤아릴수가 없는 것이다. " 굴하여 진술하노니 명안 납승은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리라 " 그 신고의 기분을 말하자면, 벙어리가 쓴 과실을 먹고 말도 못하는 심정이라, 다른사람에게 말을 할수 없는 정이니 눈 밝은 납승은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란 말이다. 이 두 글귀는 설두대사가 자기의 심각한 체험으로부터 후배를 편달한 교훈이라 귀를 기울리고 듣지 아니할수가 없는 것이다. 이 글귀가운데 그대를 위한다는 위군이란 군자는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이것은 자기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니 석가여래께서 49년이나 사바세계에서 법을 펴신 것도 그대를 위한 것이요, 달마대사가 만리의 창파를 건너서 중국에 오신 것도 그대를 위한 것이요, 2조혜가 대사가 팔을 끊은 것도 그대를 위한 것이요, 자명대사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찌른것도 그대를 위한 것이요, 기타 역대조사가 분골쇄신하고 방신사명 하신 것도 그대를 위한 것이니곧 마조대사의 '일면불 월면불'의 당체가 곧 그대인 것이다. 그런즉 우리 납승이 3독5욕번뇌 가운데서 참된그대를 발견하는 것이 주되는 목적이라고 하겠다. <불교명저)(서음미디어 발행) 제2권 "선이란무엇인가 "에서 발췌> ~ 보디삿트와 책임배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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