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관

♤ 아버지와 아들 (우범선, 그리고 우장춘) ♤

무루2 2017. 9. 17. 20:05


The Korean history ~ 115

♤ 아버지와 아들 (우범선, 그리고 우장춘) ♤




아버지와 아들 歷史를 논하다 / 人文이야기


역사를 옳게 읽으면 옷깃을 여미게 되고, 역사를 바로 알게 되면 두려움이 생긴다.

또 역사를 바로 살피는 첩경은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단편적으로 끊어서 이해하면 대단히 큰 오류를

범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1895년 10월 8일. 일제는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三浦 梧樓)의 지휘로

50여 명의 경찰, 신문사 사장, 낭인들을 동원하여 조선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에 연루된 우범선(禹範善)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사건 당시 우범선의 공식 직함은 조선군 훈련대의 제 2대대장이었고,

계급은 참령(參領)이었다.

우범선은 도오쿄,고베(神戸)를 거쳐 일본국 최대의 조선(造船)기지라고 불리는

구레(吳市)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조선 침략의 주역들로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


그 대표적인 인물 스나가(須永) 가문의 사람으로, 그의 주선으로 사카 이나카(坡井)란

일본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두게 된다.


그리고 그 아들이 바로 우장춘. (훗날 우장춘은 스나가 가문의 호적을 들여

일본에서의 이름을 須永長春스나가 나가하루 라고 고쳐 사용하기도 한다.)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심복과도 같았던 고영근(高永根)에게

망명지인 일본 땅 구레 시에서 향년 47세로 암살 된다.


이 사건이 역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개인의 원한이라면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나야 옳지만, 역사의 흐름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우범선이 암살 되었던 구레시의 와쇼 거리 2079번지는 땅 값이 하늘과도 같다는

지금까지도 흉가 터라 하여 집을 짓지 않아 빈터(밭)로 남아 있다.

어디 그 뿐이랴.


다섯 살에 암살로 아버지를 잃은 어린이가 자라서 육종학(育種學)의 세계적인

권위자 우장춘(禹長春) 으로 성장한다.

1950년 3월 8일, 우장춘 박사는 일본 땅에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2남 4녀의

사랑하는 자식들을 남겨 둔 채 혈혈단신 가난에 쪼들리는 조국으로 돌아온다.


이 같은 우장춘 박사의 석연치 않은 귀국에 대해 몇 가지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첫째, 반역자로 몰려서 암살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우범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인가,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의 나라에 바침으로써 속죄를 하려 했는가?


둘째, 농업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육종학을 꽃 피우고 싶은 식물학 야망 때문인가?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 TV 에서도 이 같은 우장춘 박사의 수수께끼를 풀기위해

논픽션 작가 쓰노타 후사코 (角田房子) 원작의 [두 개의 조국]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되었고, 나는 그 다큐멘터리의 한국 측 리포터로 출연하게 되었다.

일본 측 연출자인 오카사키 사카에 (岡崎榮) 도 대단한 의욕을 보여서 제작진은

우장춘 박사와 관련이 있는 일본 땅을 두루 섭렵하면서 우장춘 박사의

본 쪽 자녀들과도 모두 만나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때나마 나는 똑같이 <아버지 우장춘 박사의 느닷없는 귀국이무엇을 의미 하느냐>

고 물었지만, 자녀들의 대답은 모두 한결 같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쑥스러운 웃음을 담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분위기가

역역하였다. 게다가 맏아들은 인터뷰에는 물론 응하지 않았고 촬영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도 만나주지를 않았다.


아내와 장성한 자녀들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농업 환경이 열악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도 우장춘 박사에게는 돌아갈 방도가 없었다.

이승만 시대의 한일관게가 민간교류를 불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장춘 박사는 일본 땅 규슈에 있는 오무라수용소(大村收容所)로 잠입하여

한국인 밀입국자로 위장했다. 어찌 비장한 각오라고 아니 할 수 있으랴.


이 이야기는 난제에 난제가 거듭되면서도 일단 촬영을 끝내면서 2시간 짜리

다큐멘터리로 완성 되었다. 한국에서는 KBS의 전파를 탔고, 일본에서는

NHK의 전파를 타면서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우장춘 박사의 학문적인 업적은 잘 그리면서도 그의 돌연한 귀국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방송이 나간 지 며칠 뒤에 MBC 문화방송의 고문이셨던 언론인 최석채(崔錫采)

선생께서 몸소 전화를 주시면서우리들이 고민했던 부분에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셨다.

우장춘 박사가 내게 직접 말했어.

아버님을 대신하여 조국에 속죄하기 위해 가족들을 버렸노라고.......


아, 등잔 밑이 어두워도 분수가 있지. 최석채 선생의 명쾌한 증언을 듣고서야

나는 우장춘박사의 일본 쪽 자녀들이 보여주었던 어색한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차마 "아버지는 우리를 배신 하였습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역사를 적은 전적들을 대하노라면 역사서에 등재된 당사자와 후손들의 관계는

단절 되어지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역사에 악명을 남긴 사람들의 후손들은 그 선조로 인해 수백 년 동안을

마음 편히 살지 못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게 된다.


또 그것은 옛 기록에서만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일도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육종학의 마술사 우장춘 박사의 고무신 할아버지 사연


[출처] 아버지와 아들 (우범선, 그리고 우장춘) |작성자 Sirius



來者님! 부디 살펴가는 인생길  되십시오.